<2021년 4월 11일 좋은교회 4부 청년젊은이 예배 설교>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을 위한 안내서”
요한복음 20:19-23
19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
부활절 둘째 주일 4부 청년젊은이 예배에 참석하신 여기 모든 성도님들과 청년, 젊은이들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을 위한 안내서’입니다. 혹시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눈치를 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2005년 헐리우드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 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특히 우리 젊은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우주 저 멀리 은하수를 여행하는 것보다 더 막연하고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남자들이 군대에 가면 고참들이 신참을 데리고 놀리던 것이 있었습니다. 신참에게 눈을 꼭 감아보라고 한 뒤에 고참이 ‘뭐가 보이냐’라고 물으면 신참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고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게 니 제대날짜야!’, ‘그게 니 미래야!’ 이 말을 들은 신참은 좌절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을 바라볼 때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저 멀리 은하수로 안드로메다로 떠나야 할 것 같은 막연함, 캄캄함….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흔히 지금의 이 시대를 ‘불안사회, 또는 불안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세계적으로 경제는 침체되고, 95년도 IMF 사태 이후로 계속되는 청년 실업률의 상승, 과거 정부들의 ‘토지공개념, 토지실명제’ 등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걷잡을 수 없는 부동산 정책은 청년들로 하여금 내 집 마련의 꿈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봤는데 ‘1978년 이후 출생자들, 부모보다 소득 적은 첫 세대’라는 기사였습니다. 흔히 이 사람들을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발걸음 부터 IMF 외환위기 때부터 시작한 ‘청년실업 1세대’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2019년 말 세계적인 팬데믹을 일으킨 코로나 바이러스, Covid-19로 인하여 모든 경제활동뿐만 아니라 활동 그 자체를 억압받는 사회로 전환되어서 가뜩이나 힘든데, 엎친데 덮친 격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비단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저를 포함한 모든 젊은이들, 그리고 기성세대들까지 언제 어떻게 망할지 모르는 최악의 불안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필요한 것, 필요한 안내서’는 무엇인지 오늘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의 말씀에는 오늘날 우리만큼이나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바로 다름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당시 유대사람들은 로마의 식민통치 아래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의 왕도 로마에 돈을 주고 산 왕이기에 같은 민족의 지도자조차 백성들에게 수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방을 주시리라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안그래도 불안한 사회를 살아가는 제자들은 로마와 유대 정부로부터 반역자의 잔당들로 추적을 당하고 있었고,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는 율법을 어긴 자들이라고 미움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의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우리만큼이나 불안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부모를 잃은 자들과 같이, 생명이요 진리이요 길이셨던 예수님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패배자였고 인생의 낙오자들이었습니다. 같은 민족마저도 두려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불안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인사는 바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에이레네 휘민’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제로 하셨던 표현은 아마도 헬라어도 아닌, 라틴어도 아닌, 아람어도 아닌 히브리어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샬롬 레켐’,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샬롬’은 평화를 말하는 인사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이 말은 그저 유대들이 사용하는 인사말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말의 ‘안녕!’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와 또한 같은 상황에 사용되는 평범한 인사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서 단순히 그저 저녁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인사를 통해 제자들은 불안에서 벗어났습니다.
본문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져보고 그가 살아나셨음을, 부활하셨음을 깨닫고 20절의 말씀과 같이 기뻐하였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본문 이 부분에 사용된 ‘기뻐하다’라는 말씀도 역시도 단순히 당시의 문화에서는 평범한 저녁인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불안감, 우리가 살고 있는 불안사회를 이겨낼 수 있는 힌트를 찾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만나고 경험한 성도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사망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샬롬’은 평범한 인사, 안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셨고, 따라서 예수님이 건네시는 ‘샬롬’은 더 이상 사람들이 흔히 인사하는 그 ‘샬롬’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27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이 주시는 평화, ‘샬롬’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하나님의 본체 즉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전통에서 ‘샬롬’ 특히 ‘여호와 샬롬’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평화, 전쟁은 그치고 사자들과 어린양이 뛰놀고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고 광야에 샘이 넘쳐흐르는(이사야 11:6-9) 완전한 평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저녁에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건내는 ‘샬롬’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포해주시는 ‘여호와 샬롬’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지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쁨은 헬라어 원어로 ‘카이로’인데 기쁨을 이야기하는 평범한 인사말, 영어로 하면 그저 ‘my plesure’ 정도의 표현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권위있는 헬라어 신학사전(DBAG, page 1074)에 따르면 “to be in a state of happiness and well-being”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의 상태가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완벽한 행복과 평안함을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안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인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 세상이 줄 수 있는 평화가 아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참된 평화, 여호와 샬롬의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필요한 안내서’를 말씀하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여호와 샬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앞서 말씀을 나눈 요한복음 14:27절의 말씀과 같이 이 불안사회에서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왜 불안해합니까?
취업의 문제입니까?
자리 잡음에 대한 문제입니까?
이렇게 보통은 경제적인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것이 정말 불안을 없앨 수 있습니까?
요새 재테크로 주식이 유행이랍니다. 너도 나도 주식을 공부해서 돈을 모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을 모으면 행복해집니까?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역사적으로 수많은 재벌가의 사람들이 불행한 인생을 살다가 갔겠습니까?
진정한 평화는 결코 썩어질 물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예수님께서는 “… …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의 마음이 더 이상 근심과 두려움으로 떨지 않아도 될 만큼 모든 것을 보장해주시는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평화의 보증인이 되어 우리의 평화를 보장해주시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그 평화가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바로 진정한 ‘여호와 샬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주님의 주시는 평화를 누리고 기뻐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받은 평화를 나만 소유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주님께서는 이 평화를 누리는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이 평화가 우리만의 것이 아닌 모든 인류의 것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참평화가 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평화를 전하는 방법에 있어 23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용서는 22절의 말씀과 같이 ‘성령을 받아서, 성령을 통해서 하는 용서’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보겠습니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성령을 받는 다는 의미는 앞구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숨을 불어넣으시고’가 선행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음 창세기 2:7의 말씀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를 연상케 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받아라’하시는 말씀은 다시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의 영혼에 ‘숨을 불어넣으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지어주신 영혼에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만 허락된 은혜입니다.
따라서 내 힘으로 하는 용서가 아닌 성령을 힘입어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로 저들의 죄가 사함받을 수 있도록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영혼으로 새창조로 지음 받은 부활신앙으로 사는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 죄로 죽어가는 저들에게도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를 다시 평화의 사절로, 용서의 사역자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웃과 평화하기 위한 첫 걸음 바로 ‘용서’입니다.
나의 판단, 나의 감정, 나의 의지로 하는 용서가 아닌 성령을 힘입어서 하는 용서입니다.
성령을 힘입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인간적 본성은 참된 용서를 할 수 없고,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을 힘입어서, 성령이 알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써만 가능한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세대의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러분,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오직 예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여호와 샬롬’의 참된 평화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근심과 두려움은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불안한 사회를 ‘기쁨과 감사’로 당당하게 헤쳐 나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이 평화를 우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십자가의 용서를 전함으로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더 이상 ‘불안사회’가 아니라 ‘행복과 안녕의 사회’ ‘기쁨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의 평화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합니다.
이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일”입니다.
2,000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지만, 이미 복음이 선언되고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열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불안사회’를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평화’를 누리는 첫 걸음입니다.
이사야서 55:1의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사라하는 여러분,
주님의 평화에 목마르시다면
돈이 있든 없든,
공로가 있든 없든,
죄가 있든 없든…
가장 먼저 포도주와 젖을 거저 주시는 주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맛보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 승리하시는 우리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우리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제목>
1. 주님, 먼저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의지와 결단을 허락하여주시고,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여주십시오.
2. 주님의 평화를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닌, 세상에 전하여 불안의 시대가 주님을 알고 평화를 누리는 기쁨의 시대가 되게 우리를 사용하여 주십시오.
‘주께 나아오라’라는 찬양입니다.
원곡의 제목은 ‘Come as you are’입니다. 번역하자면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모습, 우리의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우선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