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의 바른 의미”
요한계시록 1:1
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이 아침도 가장 귀한 첫 시간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부터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한 말씀 한 말씀 깊이 읽어가고 은혜를 나누며 조금 더디더라도 말씀을 통해 믿음의 반석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굳건하게 세워지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2,000년 역사에 가장 신비롭게 여겨지는 책 중에 하나였습니다. 크게 ‘인자와 같은 분’의 환상,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환상, 큰 바벨론의 환상,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환상 이 네 가지로 이루어진 요한계시록은 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지만 어떤 특별한 말씀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책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당시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표현했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를 담았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미 끝난 계시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것이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도 말합니다.
사실 이 모든 이야기가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이 기록된 당시이 이야기, 메세지를 들여다보고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독일어로 ‘Sitz im leben’이라고 합니다. ‘삶의 상황’이라고 하는 의미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과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기록한 성경 기록자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 특히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우리가 미혹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계시록의 말씀이 마치 무슨 우리의 미래를 딱딱 알아맞춰주는 마법의 구슬과 같이 어는 점쟁이의 점치는 것과 같이 내 미래를 들여다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계시록 뿐만 아니라 모든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지, 마치 말씀이 우리의 흉화를 막아주는 부적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르지 않고 삐뚤어진 기대가 계시록을 마치 무슨 점성술책처럼 여기는 이단들이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이 요한계시록의 이름은 처음부터 ‘요한계시록’이 아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사실 편지와 같은 형식으로 기록되었고, 성경의 모든 각 권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제목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전통적으로 성경 각 권의 제목은 해당 성경 본문의 가장 첫 단어에서 따오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창세기로 알고 있는 구약의 첫번째 책의 히브리어는 ‘베레쉬트’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처음에, 태초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창세기를 지칭할 때 ‘태초기’라고도 합니다. 성경 각 권의 제목은 사실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도 첫 문장이 “VApoka,luyij VIhsou/ Cristou/” 아포칼립쉬스 예수 그리스투라고 시작됩니다. 첫 단어인 ‘아포칼립스’라는 말이 바로 계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계시록’이라고도 부르고, 성경이 다른 예언서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 ‘계시’의 수신자이자 전달자인 요한의 이름을 따서 ‘요한 계시록’이라고 부르는 것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살피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계시의 바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계시는 원어인 ‘아포갈립쉬스’는 ‘뚜껑을 열어서 드러낸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계시는 그저 말씀이 드러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기도 하고, 성령을 통해 인간에 어두운 지혜에 조명하여 주셔서 깨닫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읽고, 듣고 묵상하는 말씀이라도 때마다 주시는 은혜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수천년 동안 흘러왔는데 여전히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흐르고 계십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뚜껑을 열어주셔서 또 우리가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고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단순히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육체를 위한 음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하루를 살아갈 영적 양식, 말씀의 양식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이유도 ‘베들레헴’이 ‘빵집’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굶주린 영혼들에게 말씀으로 채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계시는 단순히 우리가 우리의 앞날을 알기 위한 어떤 예언이 아닌, 우리의 하루 하루를 먹이시는 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우리가 걸어야 할 기대는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시는 일용할 양식인 것을 깨닫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때를 향하여 미리 알고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내게 주신 귀한 하루를 예비하신 일용할 양식을 찾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33-34 말씀에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 내게 주실 말씀, 내게 주실 일용할 양식을 통해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다가올 시험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하루 하루 매일 수업에 충실하여 공부한 학생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험이 언제 다가와도 자신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괴테는 “오늘이란, 너무 평범한 날인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리다사라는 사람은 “오늘을 잘 보라 그것은 우리의 삶, 바로 생명력을 가진 삶이다. 존재의 모든 진리와 현실은 바로 이 순간에 있다. 어제는 꿈에 불과하고,내일은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을 잘 살아간다면 모든 과거를 행복한 꿈으로 미래를 희망적인 환상의 세계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을 더 잘 지내야하는 것이다.”라고 오늘을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앞서 나누었던 것처럼
“알 수도 없는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바로 오늘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가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계시록뿐 아니라 모든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대할 것은 하나님의 음성 그 자체이고, 그 말씀이 오늘 나를 먹이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힘 주심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주시는, 여러분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는 귀한 계시가 있으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하루를 위해 채워주시는 주님의 귀한 음성이 있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이 아침의 첫시간 부터 오늘 하루를 마감할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시면서 주님의 영광 드러내는 귀한 인생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