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는 어떻게 우리에게…
요한계시록 1:1-3
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아침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여 나오신 모든 분들께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나누면서 어제는 계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포칼륍시스라는 계시는 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조명해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 오늘 하루를 살아가도록 허락하시는 영적인 일용할 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아침도 귀한 하루 힘있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일용할 양식의 은혜, 계시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아침까지 계시에 대한 말씀을 조금 더 나누고자 합니다. 어제의 말씀이 ‘계시’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이었다면, 오늘은 계시는 왜 주시는 것이고, 누구에게 주시며, 어떻게 주시는지에 대한 것에 대해 말씀을 통해 나누고 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1절 상반절을 함께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요한이 받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계시를 주신 이유에 대해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계시’가 나타날 때는 언제였습니까? ‘곧 일어나야 할 일들에 대해서 보여주시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보통은 기쁘거나 좋은 일에 대한 계시보다는 환란과 시험을 앞두고, 전쟁과 멸망을 앞두고 계시가 나타납니다. 쉽게 생각하면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이라고 할지라도 기쁘고 좋은 일은 준비 없이 맞게 되어도 여전히 기쁘고 좋지만, 환란과 시험 등은 준비가 없다면 큰 일 나기 때문입니다.
구약 요나서에서 요나 선지자는 적 바벨론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킬 계획에 대한 계시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뒤로하고 도망하였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환란에 대한 계시를 주시는 이유를 명확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멸망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깨닫게 하시고 준비하게 하셔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계시를 주시는 이유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2,000년전에 우리에게 말씀 그 자체, 계시 그 자체로써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처음 주신 말씀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하시는 말씀은 심판의 때가 머지 않았다라고 하시는 선포입니다.
사실상 종말의 선포는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주셨던 선포요, 환란을 대비하여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주신 계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말,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어떤 특정한 이단이 주장하는 선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그 날이 종말이요, 심판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신앙을 지키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시는 축제의 날, 우리가 기다리고 사모하는 날이라는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두렵고, 위험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하루를 살게하시는 영적인 일용할 양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계시를 사모하시어 소망과 생명의 은혜를 나누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계시는 누구에게 주십니까?
1절 중반절에 보면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계시는 먼저 ‘종들’에게 주십니다. ‘종들’을 통하여 선포하게 하시고 준비케 하십니다.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흔히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목회자나 임직을 맡으신 분들을 지칭하여서 조금은 아름답게 들리지만, 사실 종의 의미는 ‘노예’입니다. 주인에게 완전히 붙들려서 자신의 의지로 사는 인생이 아닌, 오직 주인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 오직 주인에게 붙들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 이 귀한 계시를 주는 대상은 오직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삶의 의지와 주도권을 맡긴 이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시를 받는 은혜를 누리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갈 힘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께 완전히 붙들린 노예, 종이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까? 실제 노예와 같이 우리의 손과 발에 사슬을 매어야 합니까? 종이라는 낙인을 찍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손과 발은 사슬이 아닌 성령에 붙들려서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들어가든지 나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심령에 화인 찍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의 고백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며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본성이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십자가로 인쳐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된 삶,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된 삶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쉽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라고 하는 질문을 달아보십시오.
이렇게 예수님께 물어보고, 예수님께 우리의 판단과 생각, 우리의 말과 행동을 물어보면서 하면 됩니다.
모든 언행심사를 이렇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 라고 물어보는 인생이 주님께 붙들린 인생, 종된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삶을 이 거룩한 질문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소망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시는 귀한 계시의 말씀, 그 은혜를 날마다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어떻게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1절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에서 ‘천사’라고 하는 말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사가 꼭 날개 달리고 머리에 고리가 달린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이 이 ‘천사’의 역할은 메신져입니다. 말씀을 전달하는 자입니다. 천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담임목사님을 통해서나, 또한 이 새벽 강단에도 부족한 종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메신져이며 천사입니다. 또한 오늘 내가 받고 들은 은혜를 누군가와 나눈다면 내가 그 누군가를 위해 주님의 계시를 나누는 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선지자에게 계시를 주셨던 이유는 혼자 알고 있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계시를 전달해야 할 메신져가 되어야 했고, 심지어 요나는 원하지 않던 원수나라의 백성을 위한 천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가족과 교우들, 동료들을 위한 천사가 되어주십시오. 주님의 말씀, 복음을 말로써도 마음으로써도 섬김과 사랑으로써도 전해주실 수 있는 천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방법이 어렵다면 주님께 물어보세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 이렇게 물으시면서 여러분께서 여러분들의 이웃을 위한 좋은 소식을 전하여 소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귀한 메신저, 천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