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는 어떻게 우리에게…

요한계시록 1:1-3
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아침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여 나오신 모든 분들께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나누면서 어제는 계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포칼륍시스라는 계시는 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조명해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 오늘 하루를 살아가도록 허락하시는 영적인 일용할 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아침도 귀한 하루 힘있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일용할 양식의 은혜, 계시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아침까지 계시에 대한 말씀을 조금 더 나누고자 합니다. 어제의 말씀이 ‘계시’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이었다면, 오늘은 계시는 왜 주시는 것이고, 누구에게 주시며, 어떻게 주시는지에 대한 것에 대해 말씀을 통해 나누고 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1절 상반절을 함께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요한이 받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계시를 주신 이유에 대해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계시’가 나타날 때는 언제였습니까? ‘곧 일어나야 할 일들에 대해서 보여주시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보통은 기쁘거나 좋은 일에 대한 계시보다는 환란과 시험을 앞두고, 전쟁과 멸망을 앞두고 계시가 나타납니다. 쉽게 생각하면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이라고 할지라도 기쁘고 좋은 일은 준비 없이 맞게 되어도 여전히 기쁘고 좋지만, 환란과 시험 등은 준비가 없다면 큰 일 나기 때문입니다.
구약 요나서에서 요나 선지자는 적 바벨론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킬 계획에 대한 계시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뒤로하고 도망하였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환란에 대한 계시를 주시는 이유를 명확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멸망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깨닫게 하시고 준비하게 하셔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계시를 주시는 이유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2,000년전에 우리에게 말씀 그 자체, 계시 그 자체로써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처음 주신 말씀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하시는 말씀은 심판의 때가 머지 않았다라고 하시는 선포입니다.
사실상 종말의 선포는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주셨던 선포요, 환란을 대비하여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주신 계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말,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어떤 특정한 이단이 주장하는 선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그 날이 종말이요, 심판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신앙을 지키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시는 축제의 날, 우리가 기다리고 사모하는 날이라는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두렵고, 위험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하루를 살게하시는 영적인 일용할 양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계시를 사모하시어 소망과 생명의 은혜를 나누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계시는 누구에게 주십니까?
1절 중반절에 보면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계시는 먼저 ‘종들’에게 주십니다. ‘종들’을 통하여 선포하게 하시고 준비케 하십니다.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흔히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목회자나 임직을 맡으신 분들을 지칭하여서 조금은 아름답게 들리지만, 사실 종의 의미는 ‘노예’입니다. 주인에게 완전히 붙들려서 자신의 의지로 사는 인생이 아닌, 오직 주인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 오직 주인에게 붙들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 이 귀한 계시를 주는 대상은 오직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삶의 의지와 주도권을 맡긴 이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시를 받는 은혜를 누리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갈 힘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께 완전히 붙들린 노예, 종이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까? 실제 노예와 같이 우리의 손과 발에 사슬을 매어야 합니까? 종이라는 낙인을 찍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손과 발은 사슬이 아닌 성령에 붙들려서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들어가든지 나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심령에 화인 찍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의 고백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며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본성이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십자가로 인쳐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된 삶,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된 삶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쉽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라고 하는 질문을 달아보십시오.
이렇게 예수님께 물어보고, 예수님께 우리의 판단과 생각, 우리의 말과 행동을 물어보면서 하면 됩니다.
모든 언행심사를 이렇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 라고 물어보는 인생이 주님께 붙들린 인생, 종된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삶을 이 거룩한 질문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소망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시는 귀한 계시의 말씀, 그 은혜를 날마다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어떻게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1절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에서 ‘천사’라고 하는 말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사가 꼭 날개 달리고 머리에 고리가 달린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이 이 ‘천사’의 역할은 메신져입니다. 말씀을 전달하는 자입니다. 천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담임목사님을 통해서나, 또한 이 새벽 강단에도 부족한 종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메신져이며 천사입니다. 또한 오늘 내가 받고 들은 은혜를 누군가와 나눈다면 내가 그 누군가를 위해 주님의 계시를 나누는 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선지자에게 계시를 주셨던 이유는 혼자 알고 있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계시를 전달해야 할 메신져가 되어야 했고, 심지어 요나는 원하지 않던 원수나라의 백성을 위한 천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가족과 교우들, 동료들을 위한 천사가 되어주십시오. 주님의 말씀, 복음을 말로써도 마음으로써도 섬김과 사랑으로써도 전해주실 수 있는 천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방법이 어렵다면 주님께 물어보세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 이렇게 물으시면서 여러분께서 여러분들의 이웃을 위한 좋은 소식을 전하여 소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귀한 메신저, 천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계시의 바른 의미” 요한계시록 1:1

“계시의 바른 의미”

요한계시록 1:1
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이 아침도 가장 귀한 첫 시간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부터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한 말씀 한 말씀 깊이 읽어가고 은혜를 나누며 조금 더디더라도 말씀을 통해 믿음의 반석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굳건하게 세워지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2,000년 역사에 가장 신비롭게 여겨지는 책 중에 하나였습니다. 크게 ‘인자와 같은 분’의 환상,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환상, 큰 바벨론의 환상,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환상 이 네 가지로 이루어진 요한계시록은 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지만 어떤 특별한 말씀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책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당시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표현했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를 담았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미 끝난 계시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것이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도 말합니다.
사실 이 모든 이야기가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이 기록된 당시이 이야기, 메세지를 들여다보고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독일어로 ‘Sitz im leben’이라고 합니다. ‘삶의 상황’이라고 하는 의미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과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기록한 성경 기록자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 특히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우리가 미혹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계시록의 말씀이 마치 무슨 우리의 미래를 딱딱 알아맞춰주는 마법의 구슬과 같이 어는 점쟁이의 점치는 것과 같이 내 미래를 들여다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계시록 뿐만 아니라 모든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지, 마치 말씀이 우리의 흉화를 막아주는 부적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르지 않고 삐뚤어진 기대가 계시록을 마치 무슨 점성술책처럼 여기는 이단들이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이 요한계시록의 이름은 처음부터 ‘요한계시록’이 아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사실 편지와 같은 형식으로 기록되었고, 성경의 모든 각 권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제목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전통적으로 성경 각 권의 제목은 해당 성경 본문의 가장 첫 단어에서 따오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창세기로 알고 있는 구약의 첫번째 책의 히브리어는 ‘베레쉬트’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처음에, 태초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창세기를 지칭할 때 ‘태초기’라고도 합니다. 성경 각 권의 제목은 사실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도 첫 문장이 “VApoka,luyij VIhsou/ Cristou/” 아포칼립쉬스 예수 그리스투라고 시작됩니다. 첫 단어인 ‘아포칼립스’라는 말이 바로 계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계시록’이라고도 부르고, 성경이 다른 예언서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 ‘계시’의 수신자이자 전달자인 요한의 이름을 따서 ‘요한 계시록’이라고 부르는 것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살피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계시의 바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계시는 원어인 ‘아포갈립쉬스’는 ‘뚜껑을 열어서 드러낸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계시는 그저 말씀이 드러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기도 하고, 성령을 통해 인간에 어두운 지혜에 조명하여 주셔서 깨닫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읽고, 듣고 묵상하는 말씀이라도 때마다 주시는 은혜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수천년 동안 흘러왔는데 여전히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흐르고 계십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뚜껑을 열어주셔서 또 우리가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고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단순히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육체를 위한 음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하루를 살아갈 영적 양식, 말씀의 양식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이유도 ‘베들레헴’이 ‘빵집’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굶주린 영혼들에게 말씀으로 채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계시는 단순히 우리가 우리의 앞날을 알기 위한 어떤 예언이 아닌, 우리의 하루 하루를 먹이시는 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우리가 걸어야 할 기대는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시는 일용할 양식인 것을 깨닫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때를 향하여 미리 알고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내게 주신 귀한 하루를 예비하신 일용할 양식을 찾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33-34 말씀에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 내게 주실 말씀, 내게 주실 일용할 양식을 통해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다가올 시험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하루 하루 매일 수업에 충실하여 공부한 학생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험이 언제 다가와도 자신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괴테는 “오늘이란, 너무 평범한 날인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리다사라는 사람은 “오늘을 잘 보라 그것은 우리의 삶, 바로 생명력을 가진 삶이다. 존재의 모든 진리와 현실은 바로 이 순간에 있다. 어제는 꿈에 불과하고,내일은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을 잘 살아간다면 모든 과거를 행복한 꿈으로 미래를 희망적인 환상의 세계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을 더 잘 지내야하는 것이다.”라고 오늘을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앞서 나누었던 것처럼
“알 수도 없는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바로 오늘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가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계시록뿐 아니라 모든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대할 것은 하나님의 음성 그 자체이고, 그 말씀이 오늘 나를 먹이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힘 주심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주시는, 여러분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는 귀한 계시가 있으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하루를 위해 채워주시는 주님의 귀한 음성이 있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이 아침의 첫시간 부터 오늘 하루를 마감할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시면서 주님의 영광 드러내는 귀한 인생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을 위한 안내서” 요20:19-13

<2021년 4월 11일 좋은교회 4부 청년젊은이 예배 설교>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을 위한 안내서”

요한복음 20:19-23
19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
부활절 둘째 주일 4부 청년젊은이 예배에 참석하신 여기 모든 성도님들과 청년, 젊은이들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을 위한 안내서’입니다. 혹시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눈치를 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2005년 헐리우드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 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특히 우리 젊은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우주 저 멀리 은하수를 여행하는 것보다 더 막연하고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남자들이 군대에 가면 고참들이 신참을 데리고 놀리던 것이 있었습니다. 신참에게 눈을 꼭 감아보라고 한 뒤에 고참이 ‘뭐가 보이냐’라고 물으면 신참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고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게 니 제대날짜야!’,  ‘그게 니 미래야!’ 이 말을 들은 신참은 좌절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을 바라볼 때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저 멀리 은하수로 안드로메다로 떠나야 할 것 같은 막연함, 캄캄함….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흔히 지금의 이 시대를 ‘불안사회, 또는 불안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세계적으로 경제는 침체되고, 95년도 IMF 사태 이후로 계속되는 청년 실업률의 상승, 과거 정부들의 ‘토지공개념, 토지실명제’ 등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걷잡을 수 없는 부동산 정책은 청년들로 하여금 내 집 마련의 꿈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봤는데 ‘1978년 이후 출생자들, 부모보다 소득 적은 첫 세대’라는 기사였습니다. 흔히 이 사람들을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발걸음 부터 IMF 외환위기 때부터 시작한  ‘청년실업 1세대’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2019년 말 세계적인 팬데믹을 일으킨 코로나 바이러스, Covid-19로 인하여 모든 경제활동뿐만 아니라 활동 그 자체를 억압받는 사회로 전환되어서 가뜩이나 힘든데, 엎친데 덮친 격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비단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저를 포함한 모든 젊은이들, 그리고 기성세대들까지 언제 어떻게 망할지 모르는 최악의 불안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필요한 것, 필요한 안내서’는 무엇인지 오늘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의 말씀에는 오늘날 우리만큼이나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바로 다름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당시 유대사람들은 로마의 식민통치 아래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의 왕도 로마에 돈을 주고 산 왕이기에 같은 민족의 지도자조차 백성들에게 수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방을 주시리라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안그래도 불안한 사회를 살아가는 제자들은 로마와 유대 정부로부터 반역자의 잔당들로 추적을 당하고 있었고,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는 율법을 어긴 자들이라고 미움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의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우리만큼이나 불안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부모를 잃은 자들과 같이, 생명이요 진리이요 길이셨던 예수님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패배자였고 인생의 낙오자들이었습니다. 같은 민족마저도 두려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불안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인사는 바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에이레네 휘민’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제로 하셨던 표현은 아마도 헬라어도 아닌, 라틴어도 아닌, 아람어도 아닌 히브리어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샬롬 레켐’,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샬롬’은 평화를 말하는 인사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이 말은 그저 유대들이 사용하는 인사말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말의 ‘안녕!’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와 또한 같은 상황에 사용되는 평범한 인사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서 단순히 그저 저녁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인사를 통해 제자들은 불안에서 벗어났습니다.
본문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져보고 그가 살아나셨음을, 부활하셨음을 깨닫고 20절의 말씀과 같이 기뻐하였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본문 이 부분에 사용된 ‘기뻐하다’라는 말씀도 역시도 단순히 당시의 문화에서는 평범한 저녁인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불안감, 우리가 살고 있는 불안사회를 이겨낼 수 있는 힌트를 찾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만나고 경험한 성도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사망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샬롬’은 평범한 인사, 안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셨고, 따라서 예수님이 건네시는 ‘샬롬’은 더 이상 사람들이 흔히 인사하는 그 ‘샬롬’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27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이 주시는 평화, ‘샬롬’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하나님의 본체 즉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전통에서 ‘샬롬’ 특히 ‘여호와 샬롬’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평화, 전쟁은 그치고 사자들과 어린양이 뛰놀고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고 광야에 샘이 넘쳐흐르는(이사야 11:6-9) 완전한 평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저녁에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건내는 ‘샬롬’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포해주시는 ‘여호와 샬롬’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지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쁨은 헬라어 원어로 ‘카이로’인데 기쁨을 이야기하는 평범한 인사말, 영어로 하면 그저 ‘my plesure’ 정도의  표현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권위있는 헬라어 신학사전(DBAG, page 1074)에 따르면 “to be in a state of happiness and well-being”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의 상태가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완벽한 행복과 평안함을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안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인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 세상이 줄 수 있는 평화가 아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참된 평화, 여호와 샬롬의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필요한 안내서’를 말씀하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여호와 샬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앞서 말씀을 나눈 요한복음 14:27절의 말씀과 같이 이 불안사회에서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왜 불안해합니까?
취업의 문제입니까?
자리 잡음에 대한 문제입니까?
이렇게 보통은 경제적인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것이 정말 불안을 없앨 수 있습니까?
요새 재테크로 주식이 유행이랍니다. 너도 나도 주식을 공부해서 돈을 모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을 모으면 행복해집니까?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역사적으로 수많은 재벌가의 사람들이 불행한 인생을 살다가 갔겠습니까?
진정한 평화는 결코 썩어질 물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예수님께서는 “… …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의 마음이 더 이상 근심과 두려움으로 떨지 않아도 될 만큼 모든 것을 보장해주시는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평화의 보증인이 되어 우리의 평화를 보장해주시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그 평화가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바로 진정한 ‘여호와 샬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주님의 주시는 평화를 누리고 기뻐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받은 평화를 나만 소유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주님께서는 이 평화를 누리는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이 평화가 우리만의 것이 아닌 모든 인류의 것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참평화가 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평화를 전하는 방법에 있어 23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용서는 22절의 말씀과 같이 ‘성령을 받아서, 성령을 통해서 하는 용서’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보겠습니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성령을 받는 다는 의미는 앞구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숨을 불어넣으시고’가 선행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음 창세기 2:7의 말씀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를 연상케 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받아라’하시는 말씀은 다시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의 영혼에 ‘숨을 불어넣으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지어주신 영혼에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만 허락된 은혜입니다.
따라서 내 힘으로 하는 용서가 아닌 성령을 힘입어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로 저들의 죄가 사함받을 수 있도록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영혼으로  새창조로 지음 받은 부활신앙으로 사는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 죄로 죽어가는 저들에게도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를 다시 평화의 사절로, 용서의 사역자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웃과 평화하기 위한 첫 걸음 바로 ‘용서’입니다.
나의 판단, 나의 감정, 나의 의지로 하는 용서가 아닌 성령을 힘입어서 하는 용서입니다.
성령을 힘입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인간적 본성은 참된 용서를 할 수 없고,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을 힘입어서, 성령이 알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써만 가능한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세대의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러분,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오직 예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여호와 샬롬’의 참된 평화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근심과 두려움은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불안한 사회를 ‘기쁨과 감사’로 당당하게 헤쳐 나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이 평화를 우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십자가의 용서를 전함으로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더 이상 ‘불안사회’가 아니라 ‘행복과 안녕의 사회’ ‘기쁨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의 평화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합니다.
이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일”입니다.
2,000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지만, 이미 복음이 선언되고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열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불안사회’를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평화’를 누리는 첫 걸음입니다.
이사야서 55:1의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사라하는 여러분,
주님의 평화에 목마르시다면 
돈이 있든 없든, 
공로가 있든 없든, 
죄가 있든 없든… 
가장 먼저 포도주와 젖을 거저 주시는 주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맛보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 승리하시는 우리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우리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제목>
1. 주님, 먼저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의지와 결단을 허락하여주시고,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여주십시오.
2. 주님의 평화를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닌, 세상에 전하여 불안의 시대가 주님을 알고 평화를 누리는 기쁨의 시대가 되게 우리를 사용하여 주십시오.
‘주께 나아오라’라는 찬양입니다.
원곡의 제목은 ‘Come as you are’입니다. 번역하자면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모습, 우리의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우선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Amazing Grace” 고전 15:1-11

<2021년 4월 4일 부활주일 좋은교회 4부 청년젊은이 예배 설교>
Amazing Grace
고린도전서 15:1-11
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드린 말씀을 헛되이 믿지 않고, 그것을 굳게 잡고 있으면, 그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5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6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7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이렇게 전파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할렐루야! Happy Easter!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 날에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기쁨과 영생의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매우 분명하고 강력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 안에는 성탄절, 사순절, 성령강림절, 감사절, 왕국절 등 여러 다양한 절기가 있지만, 단연코 그 모든 절기 중에 가장 중요한 절기는 바로 부활절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였기에 이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었음이 증명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인 것이 확증되고, 주님이 가르쳐주셨던 모든 가르침들이 새로운 계명이자 새로운 율법임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일어나는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강림의 역사, 성령의 충만한 교회의 시대가 다 허구나 전설이 아닌 분명한 Fact 로써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기독교 절기에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그 분의 죽음이 우리 모두의 죄를 속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 분은 그냥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머니 마리아나 동생 야고보의 죄를 사해주는 것에 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것을 입증하셨고, 요한복음의 기자가 고백한 것과 같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지으셨고,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우리 기독교 신앙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 천지를 지으신 예수님시기에 이 천지만물의 모든 가치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이 2,000년전에 십자가에서 단 한 번 흘리신 보혈, 단 한 번 그 분이 내어주신 생명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과 모든 지구 상과 우주의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생명의 죄를 대속하시기에 충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바로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2,000년 베들레헴의 한 마굿에서 찾아오셔서 전하신 ‘천사가 와서 전하여준 좋은 소식’ 헬라어로 ‘유앙겔리온’ 바로 복음입니다.
부활주일은 이렇게나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감격적인 날입니다. 오늘의 기쁨과 감격이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에 벅차도록 충만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바울은 1절의 말씀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일깨워드린다는 말은 이 복음이 선명하고 정확하게 고린도교인들에게 드러나게 해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기독교인들만 간직하고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 것이 전해저야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에 모여있는 120명의 제자들에게 분명이 명령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입니다.
무엇에 대한 증인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가 십자가 보혈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엄중한 사명인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시는 오늘 부활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온 이방땅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자신의 사도성이나, 자신이 세력을 넓히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매우 분명하고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3절의 말씀과 같이  ‘나도 전해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 ‘중요하다’는 말의 원어는 ‘프로토스’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최상의 가치, 그러므로 가장 최우선시 되어야 하는’ 의미를 뜻함으로 복음을 듣는 모든 자들이 구원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도바울이 택한 가장 최선의 방법은 이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3절부터 말씀에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사람들에게 보이시어 부활의 증거를 증명하신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8절에 이르러서는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어머니 뱃속에서 달이 차지 못하고 난 ‘미숙아’와도 같이 연약한 존재임을 낮추어 스스로 고백합니다.
이 말씀은 복음은 거룩한 자들에게, 완성된 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하여도, 심지어는 죄가 많아도 아니 죄가 많기에 당연히 주님께서 찾으시는 병자요 어둠에 잠자는 자들이기에 그런 자들을 위해 피흘리셨기에 복음은 죄인들의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하여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몇번의 교회발 재확산을 통하여서 교회의 위상은 정말 땅에 곤두박칠 치고 말았습니다. 그런 중에 어떤 택시기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던집니다.
어떤 성도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성도님에 목에 걸려있는 십자가목걸이를 보더니, 교회다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하는 말이
‘이제 나도 교회를 다녀보려고요. 평소에는 내가 죄가 너무 많아서 교회를 다니지 못했는데… 요새 보니 교회에 나보다 더한 죄인도 많더라구요…’
반갑고도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그나마 교회에 나올 수 있는 진입장벽이 낮아졌다는 다행스러운 이야기라고 위안 삼아봅니다.
사실 교회공동체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그 개개인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여지없이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우리 개개인은 세상보다 깨끗하고 거룩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이 머리되시는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가 거룩한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우리는 세상이 더럽고 타락하다고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먼저 구원받은 자로써 더욱 더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위해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9절의 말씀에 ‘… …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그래서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 죄인의 우두머리, 죄인의 두목’라고 자신을 고백합니다.  그런 죄인까지도 살리시는 은혜가 예수님의 사랑이요 복음입니다.
우리 다 같이 10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0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멘, 이것은 바울의 고백일 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바울과 다름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기독교 역사의 시작은 예수님의 부활이지만, 그 이후의 역사는 ‘죄인의 역사’입니다. 그것도 가장 악한 죄인들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은혜가 있는 것은 이 악한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회개한 죄인들, 회심한 죄인들’이었기 때문이고, 기독교의 역사가 회심한 죄인들의 간증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가 더욱 가치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깨워’내기 위해, 드러내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악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최상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죄인이었던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삶, 자신의 변화를 드러내는 것이 그가 전할 수 있는 최고의 복음증거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까?
기독교의 전역사를 통틀어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복음증거는 바로 내가 어떤 죄인이었는데, 예수를 만나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삶의 목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 변화’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능력이, 하나님의 복음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활주일에 죄인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힘입어 새로운 삶을 살기고 다시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함께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나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닙니다.
 나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난 새사람, 새로운 인생입니다!
 죄인이었던 나의 삶이
 변화된 것이 복음입니다!”
‘존 뉴튼’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이 사람은 노예선의 선원이자 노예상인이었습니다.
노예를 학대하던 사람이었고, 노예의 시체를 상어 밥으로
심지어는 살아있는 노예를 바다에 던져 죽게 하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모든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팔고 괴롭히던 흑인 노예들의 인권을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이전의 노예상 존 뉴튼은 죽고, 새로운 크리스챤 존 뉴튼이 되었습니다.
그가 지었던 찬양이 바로 ‘Amazing Grace’ 입니다.
(시적인 표현임으로 살을 붙여서 번역해보겠습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 그 얼마나 달콤한 소리입니까?
That saved a wretch like me
그 소리는 비열한 악마와도 같은 나를 살려주신 소리입니다.
I once was lost, but now I am found
악마와도 같았던 그 한 때 나는 잃어버린 심령이었으나, 이제 나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로  찾아졌습니다.
Was blind, but now I see
예전에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없었지만, 이제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제목>
1. 이렇게 악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여 주셔서 나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2. 이제 나의 변화된 삶이 나의 삶의 지경에 드러나게 해주시고,
    나의 삶이 주님의 복음의 도구로 사용되게 하소서.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  Was blind, but now I see
‘Twas grace that taught my heart to fear /  And grace my fears relieved
How precious did that grace appear /  The hour I first believed
My chains are gone, I’ve been set free
My God, my Savior has ransomed me
And like a flood His mercy reigns /  Unending love /  Amazing grace